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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전 연인, 다시 만나도 될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

얼마전 연인과 헤어졌다.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던지라 이별하고도 나는 건조하기만 했다.

분명 건조한데, 괜히 기분이 다운되고 양껏 울고 싶었다. 그래서 울기 위해 슬픈 영화를 검색해서 이 영화를 보았다.

 

벌써 세 번째 보는 영화인데 이별하고 보니 또 색다르더라.

마지막 기억이 지워지는 장면에서, 여기 있지 그랬어, 하는 클렘의 말에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후회해, 라고 말하는 조엘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러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후회가 남지 않았다.

 

기억이 지워지고도 조엘이 자주 쓰던 Nice라는 말에 반응하는 클렘을 보았다.

맞아, 연애는 각자의 언어를 공유해서 둘만의 사전을 집필해가는 일이었지.

 

최선을 다해줘, 라고 클렘은 지워지며 말했다.

조금 아팠다. 최선에 대한 너와 나의 정의가 끝까지 달랐기에, 우리의 공동집필은 이어질 수 없었다.

 

It's okay. Okay. 둘은 마주보며 웃는다.

정말 괜찮을까. 둘이 테이프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매력이라고 느꼈던 부분을 결국 싫어하게 된다.

지금은 기억이 지워졌으니 괜찮다고 해도. 다시 만났을 때에도 같은 스토리의 반복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 okay는 '반복 되어도 괜찮다'는 말일까. 반복 되더라도 그 안에서 느낀 행복은 진짜니까?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고 마지막 화면에 "Eternal Sunshine of the Sportless Mind"라는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알고 보니 이게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라고 한다. "흠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

익숙해서 찾아보니 영화 내에 이 문구가 들어간 시가 나왔었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r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죄 없는 수녀의 삶을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잊히니.

흠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이여!

모든 기도는 받아들여지고, 모든 바람은 체념되네."

 

17세기 영국의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의 시이고, 시의 제목은 Eloisa to Abelard더라.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놀랐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라면 12세기 그 비운의 사랑의 주역들 아닌가.

비밀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를 낳았지만 아벨라르에게 방해가 될까 그를 떠난 엘로이즈도,

그로 인해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버렸다고 오해한 엘로이즈의 숙부에 의해 거세된 아벨라르도,

비운의 사랑이 막을 내린 후엔 모두 수녀원, 수도원에 들어가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세상을 잊고 세상에서 잊혀져서 행복했을까? 그들의 모든 바람, 사랑이 체념되었음에도?

나는 잘 모르겠다. 평온은 하겠다만, 글쎄. 슬픔이 없는 삶에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

평생 행복했던 과거의 잔흔만을 좇고 되새기며 살게 되지 않았을까?

흠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이 따스함과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시의 전문을 본 게 아니라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나는 시의 이 부분이 역설 같다.

엘로이즈의 삶은 분명 행복하지 않았을 테니.

 

누군가 내게 너의 기억을 잃고 너를 다시 만나라고 한다면 나는 거부할 것 같다.

나는 진짜 행복을 느꼈다. 사실 벌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진과 일기를 보니 그랬더라.

<헤어질 결심>의 서래가 해준을 볼 때와 같은 눈을 하고 너를 보고 있더라.

사진과 편지들 구겨진 영화표 가버린 봄날의 고궁 입장권 전시회 티켓과 말린 꽃잎 따위를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너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버리지 못한 것들을 고이 간직하고 싶을 뿐.

 

그래서 나는 한국어 포스터가 조금 우습다.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니. "지울수록 특별해지는 사랑"이라니!

그들은 기억을 지웠기에 서로에게 다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같은 과정을 그저 반복하는 것에 대체 무슨 특별함이 더해진다는 말인지...